유주희의스퀴즈: 단색화의 회화적 전략

: 김승호

 

유주희의 작업실. 작가의 섬세한 손길이 흠뻑 배여 있다. 바닥에 세워놓은 작업대. 그 위에 놓인 수많은 캔버스가 단색화의 세계로 이끈다. 칸막이를 들어서면 유 작가의 초창기 작업에서부터 근작들이 시리즈별 분류되어있다. 작업대 위에는 붓을 대체한 고무로 만든 스퀴즈. 크기와 두께가 다양한 수많은 스퀴즈가 놓여있다. 유주희의 작업실은 이렇듯 작가의 노정, 창작의 근원, 컬러를 포기한 원인, 시리즈에 천착한 의도, 단색화의 회화의 전략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사각의 프레임에 이미지를 현시하는 것이 스퀴즈회화의 과제로 탄생하는 과정, 사각이라는 평면성과 시리즈의 특질, 자연에서 획득하고 감각으로 풀어낸 스퀴즈에서 단색화의 회화적 논리를 뜯어보자.

 

자연에서 감각적 현시로

유주희는 중앙도 외곽도 없고, 수평이나 수직적 방향성마저도 불식시킨 검정과 흰색의 추상적 이미지로 스퀴즈회화를 시작했다. 형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컬러를 거부해 화려함보다 캔버스라는 사각의 제한된 한계가 회화의 형식적 논리와 충돌해 빚어낸 스퀴즈.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좌에서 우로 흐르는 수직과 수평으로 밀어낸 스퀴즈의 흔적들이 부딪히면서 화면의 역동성만 남았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도 가능하지만 볼 수 없는 자연 속에 은닉된 힘이 추상적 이미지로 현시되는 것에 목도해보자. 21세기미술에서 회화이미지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단색의 화면 위에 상하로 그리고 좌우로 이어달리는 스퀴즈의 행위. 인간의 직립보행, 나무가 자라는 수직적인 역동성이 대지라는 수평이 전제되어야 하듯이, 그리하여 대지와 하늘사이에 발생하는 에너지를 몸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현시할 수 있지 않는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연공간에서 볼 수 있는 가시적 대상이 아니라 회화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표현의 대상과 심리적 거리를 둠으로써 창작의 주체인 자신을 자유로운 곳으로 옮겨놓게 된다. 스퀴즈회화가 감각의 대상과 특수한 친밀성을 갖는 것은 모더니즘이 추구한 회화의 본질에 대한 탐구정신과 무관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바람이 부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통해 인식하듯이 물질(물감)은 회화의 근원인 행위를 보여주는 수단이고, 형식주의회화에 컬러를 포기한 감각의 자율성은 스퀴즈회화의 행위에서 유효해지기 마련이다.

 

감각적 현시에서 스퀴즈회화로

2006. 변화가 시작됐다. 어둠이 지배적이었던 것에서 이제부턴 스퀴즈가 파랑, 노랑, 연두색, 갈색, 회색 등 단색으로 바뀌었다. 두폭화, 세폭화, 네폭화 등 배치형식도 변했다. 병치의 전략이 두드러진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분리하여 생성된 하나의 하면에 두개의 면이 병치된다. 단 한번으로 화면 위를 지나간 스퀴즈의 방향이 속도와 집중을 요구한 반면에, 단색의 화면은 붓질의 흔적을 제거하여 명상적이자 깊이조차 가늠키 어려울 정도다. 하나의 작품에 한 면은 스퀴즈, 다른 한 면은 단색면, 흰색과 검정의 스퀴즈, 컬러의 단색면, 스퀴즈의 추상적 이미지와 화면 위를 지나는 수평적 방향성은 변함없다. 한쪽은 물질로 행위를 가시화하고 그리고 다른 한쪽은 물질을 거부한 단색의 회화적 전략이 새롭다. 병치의 논리가 회화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가. 우선 대상의 실체를 파악하기 이전의 상태가 필요하다. 경험과 체험을 통해 발생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판단을 하기 이전의 상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숨쉬기와 비교해보자. 회화의 기본매체인 붓을 대체한 스퀴지로 밀어낸 추상적 이미지는 숨을 들어 마시는 반면에,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붓질조차 거부한 단색의 평면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면서 평온해진다. 무의식적 행위인 들숨과 날숨을 의식적으로 제한하면 무의식적 행위를 인식하게 되는데, 의식적으로 제어된 원초적인 행위로 인해 바로 여기그리고 지금이라는 현존을 인식하게 된다. 스퀴즈회화의 논리는 이렇듯 감각적 경험에 속하는 것이자 판단 이전의 상태, 즉 나쁨과 좋음 그리고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합리적 이성으로 판단한 원인결과의 상태를 펼쳐낸다. 판단 이전의 상태로 환원하는 것이 회화에서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하면서 절제된 역동미, 역동적이면서도 명상적인 고요미, 차가우면서도 밝은 명료미, 움직이면서도 정지된 평온미, 두툼하면서도 평온한 가벼운 미가 공존한 스퀴즈회화의 미적 가치가 병치전략으로 다채롭다.

유주희의 미학적 병치전략. 그녀의 스퀴즈는 회화의 본질이 행위에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상단의 화면이 두터운 추상적 이미지로 회화적 행위를 시각적으로 가시화한 반면에, 붓질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게 처리된 하단부의 화면은 색의 형태가 화면이고 화면의 형태가 색이라는 모더니즘의 추상적 형식미에 기댄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만듦의 세계(POIETON)라는 오랜 명제가 자연에서 감각으로 그리고 감각에서 스퀴즈회화로 이어달려 회화는 만듦과 몸의 경험을 적합하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 아름다움을 판단하기 이전으로 환원하기, 인간의 감각적 인식의 현존, 그러한 환원과 현존은 오로지 병치미학의 뿌리이자 단색미의 층마저 두텁게 한다.

 

스퀴즈회화에서 수행의 반복으로

유주희의 블루. 역동성에서 부드러운 사각형의 겹침과 물감의 번짐과 캔버스의 표면마저 보인다. 흰 바탕에 파랑의 스퀴즈조각들이 겹치면서 화면이 다층적이다. 반복된 수행적 행위가 무상무념의 상태로 시선을 유도한다. 파란 단색조의 물질/물감이 캔버스 위에 수없이 반복된 스퀴즈, 집중과 반복의 연속성, 일정함과 정확함 그리고 단조로움과 균질감이 공존하는 블루. “추운 겨울 도로변 가지가 없는 가로수에 매료된 시각적 경험,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창공과 나무의 관계가 청색화로 변신한 셈이다.

지각된 현상이 아니라 반복된 수행이 교정된 조화로 재현되었다. 진정한 예술은 형식을 지닌다는 오랜 명제가 시리즈 작품 속에 함께 주어졌으니 이제부터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속하면서도 그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예술작품의 근원이 작품이고, 작품의 근원이 예술가라는 존재론적 의미가 단색화 시리즈로 가시화되었으니 작가의 몸과 회화의 일체도 가능해졌다. 포스트단색화가 유행한 오늘날 청색의 스퀴즈가 어디까지 수용될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이면서도 자기수행적인, 행위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제한적이면서도 무한대적인, 단조로우면서도 반복적인,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스퀴즈화의 의미의 층이 풍부하다.

유주희는 자연 속에 안기는 아름다움, 자연에 순응한 몸으로 표현하는 감각적 현시, 스퀴즈의 반복적 행위를 단색화의 과제로 삼았다. 자연에 대한 영탄이 인간의 감각에서 온다면, 거기에는 이미 인위적인 것이 내제되어있고 그것이 표현의 목적이 된다. 수단으로서의 스퀴즈, 형식으로서의 회화, 지각의 주체로서의 몸, 이러한 인위적 연관관계는 유주희 작가만이 풀어낼 수 있는 단색화임에는 분명하다. 몸과 회화의 혼연일체, 신명나는 굿판을 벌여도 무방하리라.

유주희의스퀴즈. 새로운 용어가 탄생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21세기 동시대미술에서 이해와 수용의 범위도 비켜나지 않는다. 자아수행이 회화의 과제가 되었듯이, 그리고 자연의 힘이 감각적으로 현시되었듯이, 회화는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것을 화면에 가시화한다는 명제는 지속될 것이다. 국제적으로 화두가 된 한국의 단색화, 의미의 층이 두터워지는 것은 스퀴즈가 회화의 수단이라는 측면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