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희전
생명의 리듬을 촉발하는 붓 터치
현대회화에서 표현한다는 또는 묘사하는데 따른 신체적인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지고 보면 그림이라는 평면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이미지는 신체적인 행위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행위를 주재하는 것은 정신 및 감정이다. 하지만 신체적인 행위를 통해서만이 그 정신 및 감정의 세계가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평면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인 행위는 그 결과물로서의 표현적인 이미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기에 신체적인 리듬이 아주 중요시된다. 특히 비구상 또는 추상적인 작업에서는 신체적인 리듬이 작품의 성패를 결정짓는 절대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유주희의 작업에서도 신체적인 행위는 단순히 정신 및 감정에 의해 사역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 및 정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신체적인 행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단순할 수도 있는 반복적인 붓질은 신체적인 힘과 호흡 그리고 감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감정을 조절하고 신체적인 힘을 적절히 통제하며 호흡의 균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작업의 관건이 된다.
이렇듯 그의 작품은 일련의 작업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체적인 여러 가지 반응에 의해 표정은 물론 정서까지도 결정된다. 이때 붓질은 대체로 횡적인 방향으로 반복된다. 작업과정은 지극히 단순하다. 횡적인 붓질의 반복이 여러 차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에 작업을 끝내는 것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단지 붓질의 반복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표정이 만들어질 따름이다. 그러기에 스케치 또는 심상이 구상하는 어떤 이미지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방법은 정해진 형태를 구축해 가는 구상회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처음 붓질의 시작단계부터 마지막 붓을 놓을 때까지의 전 과정이 작품의 성격을 결정지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다. 작업하는 순간 순간의 의식 및 감정의 흐름 그리고 신체적인 리듬에 따라 그 표정이 수시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종적인 작업 단계에서 감정이 격해지면 붓의 흐름도 커지거나 거칠어진다. 반면에 의식 및 감정이 평안한 상태를 유지할 경우에는 부드럽고 정적인 이미지로 귀결하기 마련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은 행위를 주도하는 의식 및 감정의 기복에 의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작품마다 표정이 다르고 정서가 다른 것도 이에 연유한다. 뿐만 아니라 재료 또한 작품의 이미지 및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물성, 즉 물감의 성질에 따라 붓의 터치가 다르게 나타난다. 물감의 농도 변화에 의해서도 표정이 달라진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한다. 그러한 변수를 적절히 통제하고 조율하는 가운데 그 자신의 미적 심미안이 작품의 최종적인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검은색과 하얀색의 대립에서 오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두 가지 색깔이 겹쳐지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중간색의 미묘한 조화로 요약된다. 검은색과 하얀색 아크릴 물감이 기조색인데, 먼저 검은색을 칠한 다음 마르기 전에 하얀색을 겹쳐 칠한다. 그리고 이어 검은색이 다시 칠해지고 하얀색이 뒤따른다. 이렇듯이 이들 두 가지 색채를 따로 따로 칠하는 과정에서 서로 겹쳐지면서 섞임으로써 그 중간색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중간색이라고 해서 회색과는 다르다. 완전한 색채혼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단지 두 색깔이 반복적인 붓질에 의해 섞이는 상태일 따름이다.
아무튼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은 검은색과 하얀색의 이중주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부분적으로 암청색이나 검정색 따위의 평면적인 이미지가 도입되기도 하는데 전체적인 인상은 여전히 검은색과 흰색의 대립과 조화의 관계로 다가온다. 이처럼 흑백이라는 이원적인 색채이미지를 조형적인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정신 및 감정을 고조시킴으로써 생기 넘치는 화면구조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생기 넘치는 화면구조는 그의 작업이 지향하는 궁극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체적인 리듬은 작업행위와 그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체적인 리듬은 화의, 즉 미적 감흥을 자극하게 되고 미적 감흥은 붓의 흐름에 리듬을 촉발한다. 붓의 터치가 주도하는 이미지에 실린 리듬은 생동감을 의미한다. 생동감이란 생명활동, 즉 생체리듬의 다른 표현이다. ‘기운생동’을 그림의 궁극적인 가치로 여긴 동양회화와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 또한 그처럼 생동하는 기운을 미적 가치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