存在와 本質
미술작품은 시대와 반시대 이중구조의 산물이다. 취미, 기호, 습관 등 자기의 코드로 시대가치를 발견하고 일단 그 가치를 부정, 그것을 다시 자신의 미래지향적 새로운 가치로 수정<치환>, 수정된 그 표현의지를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이른바 문화 변증법 이론이다.
유주희의 가치 발견의 코드는「나무」 「생명력」이다. 예컨데, 보르네오나 아마존의 나무들은 쑥쑥 잘 자라지만 추운 러시아의 소나무는 나이테가 매우 촘촘하다.
결국「생명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도시환경. 산업사회, 나아가 다원화된 이 시대 인간의 삶의 구조와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탐색으로 집약된다. 정보의 바다에서 바쁘게 허덕이는 현대인의 표피적 인간관계, 이기적 상업주의로 염색된 로스트 휴머니티 계층, 그들을 향해 "오묘한 색의 융합, 텁텁한 밀도"를 보이는 그의 평면회화가 말하듯, 원초적인 인간성 회복과 모랄의 정립을 소망하는 상징적 메세지를 보낸다.
유주희의 초기작품 타이틀은 <형(形) - 태(態)>였다. 연한 황토색 마포캔바스, 아무런 칼라링도 없이 삼베의 물성을 드러낸 면에, 굵은 나무 토막 한 두개를 땅바닥에 툭- 던져 놓은듯한 단순한 조형이다. 여기서 큰 덩어리 전체를 "태"로 본다면, 그 덩어리 속에는 흑.백 물감을 무작위로 놓고, 스퀴지로 밀어내기 <행위>를 반복하면서 형성되는, 우연적인 색의 융합을 "형"으로 볼 수 있다. 나무의 속살 같다. 그러니까 작가는 일단 생명 에너지원을 하나로 선정하고 <일원론>, 형-태, 본질-외형, 의미-표상, 나아가 이-기, 체-용, 음-양 등 이분 양시론으로 전개 <확산>, 그것을 다시 화면에 조합.일체화시키는 <환원>작업이었다.
이후 그는 캔바스 전체를 먼저 울트라 마린으로 도포하고 <기본설정>, 나무 토막 같은 큰 덩어리는 짧고 작은 덩어리는 분화되어, 카오스의 우주를 부유한다. 원초적 에너지 탐색이었다. 여기서 그의 울트라 등장을 주목한다.
「...울트라 마린 블루는 채도를 한단계씩 낮추면 칠흑같이 어두운 심해 <암흑, 음>가 되고, 역으로 하나씩 높이면 쾌청한 창공 <광명, 양>이 되는것 같다...」 <작가메모>
소위 색채학에서 말하는「울트라의 신비」발견이다. 이 울트라는 지금까지도 그의 베이스먼트 칼라로 간간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의미론적으로 말하자면, '중성이 본질이다. 중간자가 결정자'라는 중용의 각성이다. 이 울트라는 차츰 단일 색면으로 변모, 화면 상.하에 수평으로 놓이며, 스퀴지로 밀어 형성된 목질(木質) 같은 텍스쳐의 융합부위와 차갑게 만난다. 콘트라스트 문법의 제시이다. 바꾸어 말하면, 양자의 자율성을 극대화시키는 이분.양시의 대위 법적 표현 방법론, 그 연장이며 다만 전작에 없던 쉐이프드는 캔바스 개념이 추가된다. 반복의 속성인 퇴보, 그 메너리즘의 위험에서 교묘히 빠져나온다.
이 시기쯤에서 그의 작품 타이틀은「untitled」로 변화. 미술작품의「제목의 오류」그 허망한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며, 전체적 컨셉 또한 이분.양시론에서 일원.본질론으로 피드백한다. 설명적 사고를 버리고 명징.단순한 단음으로 키를 잡는다고 할까,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들은 이런 컨셉의 집합이다.
따라서 울트라 색면이 점차 사라지고, 화이트의 양이 더 많은 흑.백 물감을, 스퀴지로 밀어낸 행위의 결과물<존재>로 가득하다. 동양화의 부벽준 같은, 혹은 통나무를 도끼를 찍어 자를 때 수북히 쌓이는 파편더미를, 평면조형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옮겨 놓은듯 하다<본질>. 이미 형도 태도 아니다. 작은 것이 빽빽히 끌어 모였을 때 오히려 큰 감동을 주는 역설의 미학이다. 플라톤적 기독교적 고전철학이 <본질은 실존에 선행>하는 사상이라면 <실존이 본질에 선행> 한다고 샤르트르는 그의 " 상황
이제 유주희는 이 두 역설(力設) 사이에서 촉수를 세운다.
어떤 행보를 보일까, 고민하는 예술가를 주시함. 분명 냉혹한 행복이다.